1. 노동윤리
19세기나 20세기 초반, 산업화 시기 노동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찬 공장으로 무표정한 노동자들이 걸어가는 모습,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즈>에 등장하는 배우들처럼 컨베이어 벨트 앞에 앉아서 하루 종일 나사만 조이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은 항상 ‘이 우울하고 감옥 구멍 같은 곳에서 하루빨리 도망치고 싶어’라고 외치면서도 다음날이면 공장으로 갈수밖에 없었다. 다음날에도 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비참한 공장 일을 견뎌야했던 것이다.
한창 산업화시기 때 영국정부의 사회정책을 살펴보면 노동자들이 공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아보는데 가장 중요한 사회정책은 1834년에 개정된 신 구빈법(new poor law)이다. 신 구빈법은 그 목적이 빈민구제에 있지만 숨은 목적은 빈민 중에서 노동할 수 있는 자를 가려냄에 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빈민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노동할 수 있는 빈민과 노동할 수 없는 빈민을 구분하여 노동할 수 없는 빈민만을 최소한의 구제를 받을 수 있는 자로 설정한다. 그리고 노동할 수 있는 빈민은 다시 공장으로 보내지는데, 여기서 ‘노동할 의사가 없는 빈민’은 감옥으로 보내지게 된다. 사회정책이 이러할진대 감옥에 가기 싫은 자는 어쩔 수 없이 공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그들을 공장으로 향하게 만든 것은 정부의 사회정책만이 아니다. 더욱더 근본적으로 더욱더 실질적으로 노동에 대한 의욕을 끌어낸 것은 자본이 만들어낸 신화인 ‘노동윤리’ 덕분이다.
자본은 노동자들이 비참한 노동현실을 견뎌내길 원했고 컨베이어 벨트 앞에 앉아있을 땐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고 정해진 시간동안 정해진 양의 노동을 해내길 원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자본은 노동자들이 불결하고 협소한 공장시설과 그들이 받는 최소임금 혹은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나사만 조여야 하는 현실에 불만을 제기하는 대신 한 시간 한 시간을 온힘을 다해 일할 수 있는, 노력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해도 노동을 하고 있다는 현재 앞에서 뿌듯해할 수 있는 자긍심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자본은 끊임없이 노동윤리라는 신화를 만들어내야 했다.
다행히도 노동윤리는 노동자들에게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여졌다. 노동자들은 노동을 인간의 최고 의무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되풀이하여 말한다. 노동이란 자아실현을 위해서 꼭 필요한 절차이고, 인간적 유대가 이루어지는 수단이며, 노동 후에 얻는 임금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토대라고. 그리고 아무리 비참할지라도 그 현실을 견디고 묵묵히 노동을 하면 그 후에는 자본의 축적이라는 - 그것은 결국 사회적 성공 - 성과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노동윤리는 당시 노동집약적인 산업과 철저히 공명하여 산업화의 성공에 이바지하였다. 노동윤리를 받아들이고 노동의 숭고함을 절대적으로 믿은 노동자들은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자본의 통제와 종속의 굴레로 묶여 버렸기 때문이다. 더불어 노동윤리는 자본계급의 부를 정당화해줄 수 있는 근거가 되었고, 이는 빈부격차마저 정당화해줄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부를 축적한 자본계급은 성실한 노동의 끝에 얻은 성과라고 노동자들 스스로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본이 만들어낸 신화인 노동윤리는 그 하나만으로도 그 당시 사회를 적절하게 통제할 수 있을 훌륭한 메커니즘이었다.
<Jacob Riss>
2. 노동윤리에서 소비윤리로
앞에서도 언급했듯, 당시 산업화 시기에는 노동의 비참함을 견딜 수밖에 없었고 노동윤리를 내면화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과 노동윤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남는 것은 감옥행으로 상징되는 사회적 배제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산업화를 거쳐 현재에 이르러서도 노동과 노동윤리는 노동자에겐 하나의 숭고함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현재에 이르러서 자본은 더 이상 노동윤리를 내세우지도 강요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자본은 노동 자체를 거추장스러운 대상으로 여겨 노동윤리를 폐기처분 하려고 한다. 노동집약적 공장이 아닌 첨단 기계로 이루어진 공장에선 더 이상 노동자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력 과잉은 저주라 비판받고 지속적 감축은 기업 경영에 있어 합리적 행동으로 찬양받은 지금, ‘노동유연성’과 ‘인원감축’이란 단어가 큰 힘을 얻고 있는 지금, 노동윤리는 그 의미를 잃고 텅 비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렇게 자본은 뻔뻔해졌다.
믿어왔던 노동윤리가 텅 비어버리자 노동자들은 혼란스러워졌다. 아니 그들도 이제 안다. 노동은 더 이상 숭고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 이제는 노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는 노동자는 아예 없거나 소수일 뿐이고, 인간적 유대가 이루어지는 수단도 아니며, 노동 후에 얻는 임금은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선 턱없이 부족하다고 되풀이해서 말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노동을 통해서 성공을 하는 경로는 터무니없는 바람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노동은 윤리가 아니라 단지 생존수단으로 격하된 지금, 비정규직이 아닌 정규직이 되기 위해서 치열하게 경쟁한다. 정규직이 된 자는 비정규직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 비정규직을 방패막이로 삼기도 하며(현대자동차 정규직 노조들이 쓰는 방법), 정규직 중에서도 조금이라도 ‘갑’의 위치에 서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며, 임금격차에 민감해서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받기위해서 삶을 바친다. 그리고 노동 보다는 로또와 같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 부동산투기와 주식투자와 같은 무노동으로 인한 성공이 더욱 영리한 행동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노동윤리는 사라졌고 노동자는 한층 작아졌다.
그러나 노동윤리는 없을지라도 사회에서 절대적으로 통용될 윤리는 필요하다. 아무리 뻔뻔해진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도 말이다. 노동유연성이 강조되는 산업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노동은 필요하며 그들의 노동은 절대적으로 자본에 복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계급의 부와 빈부격차의 정당성을 확고하게 만들(혹은 자본계급의 부와 그로인해 발생한 빈부격차 따위에는 눈길을 두지 않도록 만들) 새로운 윤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소비윤리’다.
3. 소비윤리
이제 대다수의 정체성은 노동자보다는 소비자의 그것이다.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소비자는 소비가 곧 윤리이다. 과거 산업화시기, 노동하지 않는 자는(그러니까 노동윤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감옥행으로 상징되는 사회적 배제만이 놓여있었던 것처럼 소비하지 않는 자는(그러니까 소비윤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평균적인 현대인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사회적 소외만이 놓여있다. 모든 이의 정체성이 소비자인 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건, 그래서 소비할 수 없다는 건 무얼 뜻하겠는가. 마치 노동자 사회에서 노동하지 않는 것과 같이 소비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사회적 소외로 연결되는 것이다.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매혹적인 대상과 그 매혹적인 대상을 욕망하는 소비자의 모습, 그 양상을 날마다 구경하는 소비자는 사치스런 소비가 결국 성공의 상징이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여긴다. 더 나아가 그것이 행복의 필요조건이고 인간의 존엄성이 완성되는 필요조건이라고 까지 여길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다짐한다. ‘사야 돼! 꼭 사야 돼!’ 그리곤 마치 산업화 시기 노동자들이 공장으로 향하듯, 우리도 일터로 향한다. 그 일터가 아무리 비참할지라도(어쩌면 과거와는 다른 의미로 비참해졌을) 묵묵히 견뎌낼 수밖에 없다. 그 매혹적인 대상을 사려면, 그래서 우리의 행복이 완성되려면 임금을 받기위해 일터로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관심과 숭배의 대상은 ‘부 그 자체’로 쏠리게 되었다. 그리고 부 그 자체를 얻기 위해선 무얼 해야 하는지, 마치 목적의 타당성이나 가치 따위엔 눈길을 두지 않고 오로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효율성에만 집착하는 관료들처럼 우리도 역시 부 그 자체를 얻기 위한 효율성에만 집착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노동윤리가 강조되었던 그 산업화시기보다 소비윤리가 강조되는 지금이 통제되기 쉬운 사회일지 모르고, 자본은 더욱더 뻔뻔해져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자본계급의 부와 그로인한 빈부격차의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노동윤리라는 최소한의 윤리적 장치를 굳이 내세울 필요가 없다. 노동윤리를 말하지 않더라도 소비윤리를 뼈 속까지 내면화한 우리들은 그들의 부정에 비판의 날을 내세우기는커녕 부러움을 표출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누가 자수성가한 사람을 부러워한단 말인가. 그 방법이 어찌되었던 부 그 자체를 많이 가진 사람을 욕망할 뿐이다.
다만 자본은 소비자들이 끊임없이 욕망하고 소비하도록 할 장치를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이면 된다. 그 정도의 크기가 클수록 자본주의 사회는 안전하게 잘 굴러갈 것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에 기름칠을 하는 것이 ‘매스 미디어’라고 본다. 근면함과 성실함으로 가득 찬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부를 축적해나가는 일이 하나의 미덕인, 그러니까 숭고한 윤리라고 미디어에서 추앙받았던 때는 그리 까마득한 과거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미디어에서는 자수성가한 인물을 '성공시대'라는 제목으로 조명했고 우리는 그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폐지를 줍거나 김밥을 말아 큰돈을 번 할머니, 소를 키우고 농사를 지어 자식들 모두 대학에 보낸 아버지의 이야기는 따뜻함을 주는 뉴스가 될 수 있었고 우리는 그들에게 감동을 보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미디어에서는 더 이상 그들을 주목하기보다는 ‘부 그 자체’를 더욱 빛날 수 있도록 형용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화려함 속에서는 노동의 모습을 찾을 수 없으며, 오직 부로 얻을 수 있는 상징만이 끊임없이 과장되고 과장되서 드러날 뿐이다. 드라마 속 어떤 주인공도 노동을 통해 성공하지 않는다. 그들은 애초에 재벌2세이고 대기업 이사이며 잘나가는 의사다. 우리들은 그들의 신데렐라가 되는 꿈을 꾸며 여주인공에 감정이입하곤 한다. 그들의 신데렐라가 될 때(이것은 근면하고 성실한 노동의 결과물이 아닌 로또 맞은 행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패션잡지에 무심히도 등장하는 명품가방을 멜 수 있을 것이고, 당신의 품격을 높여준다는 외제차를 탈 수 있을 것이다. VIP만 쓴다는 현대카드사의 'The Purple'을 당당하게 꺼낼 수도 있겠다. 이 모든 화려함은 노동의 결과물이 아닌 누구나 욕망할 수밖에 없을 신데렐라의 행운이다. 아도르노의 주장을 조금만 변용하자면 매스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모든 상징들은 소비윤리를 강요하는데 필요한 수단이다.
4. 새로운 윤리를 위하여
‘소비자’들의 조상인 ‘노동자’들이 컨베이어 벨트 앞에 앉아서 어떠한 저항도 없이 나사를 조였다면, ‘노동자’들의 후손인 ‘소비자’들은 매스 미디어 앞에 앉아서 어떠한 저항도 없이 욕망하고 소비한다. ‘노동자’에서 ‘소비자’로 개인의 정체성이 바뀌는 굴레에서, ‘노동윤리’에서 ‘소비윤리’로 자본주의의 윤리가 바뀌는 굴레에서 개인의 자율성은 과연 존재할 수 있는지 물음을 던져보고 싶다. 노동하지 않고는, 소비하지 않고는 다른 방식으로는 살 수 없는 것인지. 또는 그러한 방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행복의 단계에 또는 인간의 존엄성을 완성하는 단계에 다다를 수는 없는 것인지. 결국 ‘삶의 다른 방식’을 구성하는 개인의 자율성이란 애초에 존재하기 힘든 것인지. 산발적으로, 개인의 자율성을 추구하여 기존의 굳건한 윤리에 반기를 든 사례를 안다. <나는 루이비통을 불태웠다>의 저자인 닐 부어맨을 비롯해서 많은 소비자들이 소비윤리에 반기를 들었고 문제의식을 표출했던 일을 기억한다. 또한 지난해 3월엔 대학생 김예슬이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빛나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가 되기를 거부한다.’라고 선언했던 것을 기억한다. 다만 그것이 산발적인 이벤트에 그칠 뿐이고 거부 끝에 무엇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대안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투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동윤리’가 아니고 ‘소비윤리’도 아닌,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윤리는 개인의 자율성에 대부분 근거하고 또한 그것이 행복, 인간의 존엄성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그 과정 안에서 자율성을 가진 개인들의 끊임없는 소통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결론은 매우 추상적이지만 방향설정이 현재 필요하다고 보기에 부끄럽더라도 적는다.